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공평이라는 새로운 키워드

- 프레시안에 장하준 교수의 신작에 대한 김대호 사회디자인 연구소 소장의 반론이 실려 있는데 꽤 흥미있음, 간략한 평가를 하자면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119151949&section=02

 

- ‘공평’이라는 새로운 키워드

* 진보진영은 민중론의 영향을 받아 가난한 자, 억눌린 자를 지지해야 한다는 관점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사회역사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에 대한 지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평이라는 키워드는 음미할 가치가 있다.

* 유명환 딸 특채 파동에서 보듯 한국의 청년대중은 직접민주주의와 함께 공평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사회경제적 의제에 대한 저항은 시간이 걸릴 듯 하다.

 

- ‘복지’라는 넌센스

* 복지는 시대담론이 되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경기불황, 재정건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사회 전체를 지탱할 수 없다.

* 김대호가 지적하는 것은 ‘세계화, 지식정보화, 중국의 부상’이라는 시대상황에서 구조조정의 불가피함이다. 위 공평이라는 키워드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창조적 혁신이 중요하다.

* 김대호의 표현에 따르면 복지는 2차적 분배구조이다. 2차적 분배구조가 중요한 것은 1차적 분배구조가 안정되어 있을 때이다. 현 한국사회는 1차적 분배구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먼저 1차적 분배구조를 바로 잡아야 한다. 김대호는 사회적 상벌체계(공평)이 먼저이고 복지는 그 다음이라고 말한다.

 

- 노무현에 대한 평가

* 노무현은 사회적 상벌체계를 왜곡하는 특권구조 중 도농격차, 조중중이나 검찰 등을 문제삼았는데 이는 사회적 상벌체계를 왜곡하는 구조 중 일부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사회의 수많은 불공정과 불공평 중에서 주로 지역간 균형 발전 문제와 조중동과 재벌의 반칙을 주로 문제삼았는데”, 정작 보다 중요한 “민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수많은 합법적 제도적 불의를 간과했다”

즉 노무현은 부정해야할 인물이 아니라 넘어서야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댓글 5개:

  1. 김대호씨 주장은 상당히 정신이 없다고 나는 느끼지만, 좋은 논쟁 소재는 주고 있다고 생각함. 일단 2차적 복지 이전에 1차적 분배구조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전적으로 공감.



    그런데 실상 '공평'은 진보의 중요한 역사적 유산인 '평등'과 거의 다르지 않음. 단지 공평은 그 적용영역을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등에게 까지 좀 유연하게 확대시킨듯한 느낌이 있기는 함.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핵심이 정확하지 않음....늘 그렇듯이 정통적 견해에 의하면(나는 여전히 이를 지지함)...경제적 토대, 물질적 관계에서의 평등(또는 공평)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정치나, 사회 영역에서 여기저기 주워와서 공평사회의 지표를 들이대면 오히려 혼선만 생기게 됨.



    즉, 경제적 관계, 특히 사회적 생산과정에 참여(노동과정에 참여)에 의해 어떻게 1차적 분배를 '공평'하게 실현할 수 있는가를 정확히 해명해야 함.

    장하준 포함.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나 사회적 양극화를 말한 부분은 신자유주의가 노동소득의 공평한 분배가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나쁜 불공평 분배를 가져오고, 노동소득이 아니라 투자 소득에 의해 이것이 한번더 왜곡된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임.



    그런데 김대호씨는 이에 대해 명확한 뭔가가 없음. 복지국가 담론은 이를 원칙적으로 해결하기 보다 국가(조세)를 매개로 2차적 분배를 함으로써 이를 완화하자는 것이고....

    답글삭제
  2. 또 하나, 이런 입각점에서 볼 때, 경제생활을 하는 국민을, 소비자로 볼꺼냐, 생산자로 볼꺼냐, 아님 투자자로 볼꺼냐하는 이슈가 발생함. 신자유주의는 다수 국민을 노동하는 생산자가 아니라 투자자로 보도록 환상을 심어주고 있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민을 소비자로 부각시키는 문제가 있음. 그런데 적지 않은 NGO나 김대호씩 같은 경우도 국민을 소비자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정확히 짚히지 않음.



    소비는 필연적으로 소득이 전제되어야 함. 그런데..신자유주의는 소득 얘기는 빼고 줄창 소비자만 얘기함. 이는 소득대신 차입을 통해서 소득없는 소비자 능력이 일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임. 여기에 결정적 이슈가 있음.



    물론 소비자 강조는 '고객 중시'라는 마케팅 개념과, 무조건 생산한다는 과거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국민의 다양한 필요욕구에 맞춰 생산한다'라는 현대적인 가치와, 그리고 '소비자 주권'이라는 정당한 가치가 있기는 함.



    그러나 소득(특히 노동소득) 없는 소비자 강조는 소득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감추고, 생환활동 문제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은폐하고 ....암묵적으로 차입에 의한 소비를 조장하는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



    아무리 정보가 많고 결정권이 많아도 주머니에 돈이 없는 소비자는 소비자가 아님. 신자유주의 시대에 기업이 외치는 고객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VIP 고객'을 말하는 것임. 왜 신자유주의 시대에 vip 마케팅이 떳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함.

    답글삭제
  3. 또 하나, 억눌린 자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민중운동의 관점이라기 보다는, 과거 지식계층과 중산층, 특히 서구적 NGO운동의 '후원'개념, '불쌍한 사람을 돕고 살자'는 그런 개념에서 유래함.



    민중운동의 정통적 관점은, 억눌린 자들은 '스스로 조직해서 스스로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이고, 지식계층이나 양심인들은 여기에 보조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임..그런데 최근 민노당이나 진보운동은 전혀 이런 관점을 찾아볼 수 없고 단지 '불쌍한 서민을 돕자'는 그런 노선임. 이런 노선이 당연히 일부 도시 식자나 중산층의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함(민노동 당원 구성이 이런 경향을 띠는 것도 당연함.)





    상인운동이나 청년운동의 부상의 객관적 필연성과 가능성을 자꾸 논의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주체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고, 이런 것이 바로 전통 민중운동의 관점임.



    특히 우리는 정통 사회과학에서 토오동자 계급을 중시했던 이유를 다시 새겨봐야 함. 그것은 노동자들이 불쌍하고 억압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과학적, 역사적으로 '선진적 생산력'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임.



    맑스 시대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농민과 룸펜 플로레타이라 있었음. 그러나 당대에는 그래도 괜찮았던 노동계급을 새로운 사회의 중심으로 내세운 것은 그들이 발전하는 선진 생산력의 담지자였기 때문임.



    1980년대 자동차 공장 직원들도 당대에는 섬유나 이런 쪽의 노동자들보다 모든 면에서 괜찮은 존재였음.



    따라서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는 계급을 확인하고 이들이 주체화되는 과정을 고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 현재 진보운동이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지점임.



    또한 바로 이럴 때에만,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과제'가 비로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게 되는 것임.

    답글삭제
  4. 사족으로 참여정부가 한계를 보인 가장 큰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체계와 대응체계가 없었다는 것임.



    또한 정치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끌고 가기 보다는 지역구도 타파를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과제로 인식했다는 점일 수 있음.

    답글삭제
  5. 사족으로 참여정부가 한계를 보인 가장 큰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체계와 대응체계가 없었다는 것임.



    또한 정치적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끌고 가기 보다는 지역구도 타파를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과제로 인식했다는 점일 수 있음.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