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주도의 일극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97년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중러의 부상이다.
- 이 중 러시아의 경우 96년을 기점으로 친미친서방 노선이 무너지고 2000년 푸틴 집권을 계기로 러시아의 주권을 강조하는 흐름이 부상한다. 그리고 이를 이론화한 것이 주권민주주의론이다.
- 주권민주주의론은 최근 중국에서 부상하고 있는 중화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친미친서방 노선을 걷던 중국은 최근 군사력과 중국의 부상을 강조하는 흐름이 세를 얻고 있다. 최근 6.25 전쟁에서 중국의 참전을 항미원조라고 표현한 시진핑의 발언 또한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이다.
- 외교와 관련해서 한국은 지나치게 미국적 프리즘에 의해 걸러진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문제는 현재 국제정세가 그런 식의 어설픈 가공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격화되고 있는 점이다. 향후 한국민은 달라진 세계상에 대해 상당한 이데올로기적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주권 민주주의’와 러시아
'주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남미나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민주주의인가? 혹시 북한의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가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싫증나서 새로 만들어낸 말은 아닌가? 아니다. ‘주권 민주주의’ (suverennaya demokratiya)란 러시아의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이다.
주권 민주주의는 수르코프(Vladislav Surkov) 대통령부 부장관 겸 보좌관이 지난 2월 푸틴 대통령의 친위정당인 ‘통일 러시아’(Edinaya Rossiya)에서 행한 연설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이후 연말까지는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통일 러시아는 하원에서 450의석 중 310석을 차지하는—개헌선 2/3 초과—제1정당이다.
수르코프는 그의 이른바 ‘2월 테제’에 이어 6월과 11월에도 주권 민주주의에 관해 주요 연설을 했는데 이에 따르면, 러시아 민주주의는 2000년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국유재산을 점탈하고 국민의 권력을 찬탈한 과두재벌에 제재를 가하고 그들 소유의 언론에 대해 국가의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간신히 되살아나게 되었다.
수르코프는 푸틴 대통령이 ‘강한 국가’를 지향하여 왔음을 상기시키고 ‘강한 국가’, ‘강한 중앙’, ‘강한 대통령’이야말로 러시아 민주주의의 담보라고 강조한다. 그는 러시아 민주주의는 러시아에 맞는 민주주의라야 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서방의 ‘자유민주주의’를 반드시 추종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와 함께 러시아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민족 엘리트’의 육성을 강조하여 대중 영합적인(populist) 민주주의도 배격한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주권(suverenitet)은 민주주의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 수르코프는 러시아 주권에 대한 3대 위협으로 구 소련 지역에서 발생한 이른바 ‘색깔혁명’과 국제 테러리즘, 그리고 약한 경제적 경쟁력을 꼽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 등지에서 외부 세력이 그곳의 약체 정부를 상대로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유도함으로써 권력을 찬탈하는 것이야말로 인접한 러시아의 주권에 대한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하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 지향적인 엘리트를 육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수르코프는 이어 세계화(globalization)의 과실(果實)은 공정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며, 러시아가 제 앞가림을 못할 때 오히려 다국적 기업과 국제적인 비정부기관들(NGO)의 지배에 놓이게 되는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러시아가 세계화에 대처하여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주권을 지켜야 할 것이다. 주권이란 다름아닌 경쟁력인 것이다. 주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러시아는 우선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토대로 에너지 강대국이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명실상부하게 초강대국으로 일어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민족지상주의나 고립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이와 함께 극단적인 국가주의도 배격한다. 다만, 수르코프에 따르면, 러시아의 주력 산업인 연료-에너지 부문과 정보•통신, 금융 및 방위산업 등 기간산업 분야는 러시아 자본의 배타적 관리하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러시아의 주권을 보전한 가운데 민주주의 건설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푸틴 대통령의 친위로서 ‘통일 러시아’가 앞으로 최소한 10-15년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관변 이념가들은 종전의 러시아 민주주의를 ‘관리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라고 지칭하여 왔다. 관리 민주주의의 주된 특징으로 무엇보다도 의회를 비롯한 다른 권력의 중심을 압도하는 대통령의 권한, 즉 대통령 대권제, 그리고 시민사회에—언론과 비정부 단체 등—대한 국가 통제가 강조되어 왔다. 아울러 선거의 국가 통제 및 지방과 대면한 중앙의 강화, 친정 부 사회세력의 조직화 등이 추진되어 왔다.
이제 ‘관리 민주주의’가 ‘주권 민주주의’로 바뀐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크렘린의 최고 이념가는 말한다: “나는 민주주의가 주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그러나 수르코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정작 강조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주권이다. 주권 민주주의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지는 “우리는 우리식 민주주의를 고수할 것이며, 다른 나라는—즉, 서방은—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안으로는 러시아 민족주의에 호소하고, 밖으로는 러시아에 대한 내정간섭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의 전통적인 영향권으로 치부하고 있는 지역에서 더 이상 섣불리 서방 민주주의 같은 것을 보급하려 들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지금 주권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렘린 당국은 이미 2005년부터 ‘주권’을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오렌지 혁명’(2004. 11-2005.1)으로 충격을 받은 데 따른 것이다. 러시아는 이 혁명이 외부의—즉, 서방의—압력과 밑으로부터의 봉기가 야합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서방의 “원격조정”과 민중봉기 모두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주권 민주주의는 민주화 혁명이 러시아로 파급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및 서방의 “간섭”에 대한 대응인 것이다.
이밖에 다른 이유는 없는가? 푸틴 대통령은 지난 10월 ‘국민과의 대화’ 텔레비전 프로에서 자신이 2008년에 퇴임하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러시아가 발전하는데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의 연속 3선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개헌을 하지 않는 한 그의 임기는 2008년에 끝나게 되는데, 이에 불구하고 임기 이후 영향력 행사를 언급한 것은 계속해서 러시아 정치의 ‘상왕’으로 남아있을 생각임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푸틴 대통령은 ‘통일 러시아’를 기반으로 한 가운데 ‘주권 민주주의’를 사실상 구 소련의 공산주의에 필적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승격하여 계속해서 러시아 정치를 요리할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가 전제주의(autocracy)로 후퇴하고 있다는 주장이 러시아 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는 마당에 이제 ‘주권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러시아 정치가 어느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게 될지 ‘한국적 민주주의’를 경험했던 우리로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한구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hkchung@sejong.org
주요국제문제분석(10-23 김흥규).pdf
조선 산업 해외진출과 산업공동화 우려.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