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학번과 82학번을 가르는 선
- 80~83년 학내에 전경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잠재적 저항 세력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늦추지 않았다. 이를 배경으로 80~83년 절망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아마 당시의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을 쉬 몰아낼 수 없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저항을 계속한 것은 80년 광주가 이미 승패를 넘어 하나의 신념으로 소화되었기 때문이다.
- 84년 초 대학내에 전경병력이 철수하면서 상황은 빠르게 반전되기 시작했다. 84년 상반기 학생들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경찰병력이 철수한 공간에서 한학기를 머뭇거리며 시간을 흘려 보냈다.
2학기 들어 상황이 명백해지자 서울의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회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 흐름은 예상을 뛰어 넘는 호응을 불러 일으키며 학생들을 빠르게 결집하기 시작했다. 서울대의 경우 이정우 선배가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해 선풍을 일으켰고 이에 당황한 경찰은 이정우 선배에 수배령을 내린다. 이에 저항한 당시 1학년 학생들의 시험 거부 투쟁이 벌어진다.(나는 당시 1학년으로 이 어설픈 시위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생회에 결집했던 선배급 학생들과 1학년 사이의 괴리는 컸다. 1학년들의 시험거부 투쟁은 전두환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된다.
이 교착국면을 돌파한 것인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 중앙당사 농성 사건이다. 이후 수많이 진행된 점거 농성의 효시쯤 되는 이 사건은 시험거부 투쟁 이후 느슨했던 학내 분위기를 일신하며 85.2.12 12대 총선에서 학생운동이 대도약하는 계기를 만든다.
- 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학내에서 경찰력이 약화된 데 이어 유세공간에서 경찰병력의 노골적인 압박이 느슨해졌다. 이를 배경으로 억눌렸던 민심이 대폭발하기 시작한다. 85.2.12 총선의 열기는 85년 상반기 서울의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전국 대학에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85년 5월 18일(?) 서울대는 무려 5000명이 참가하는 교문싸움이 4시간 이상 벌어졌다. 그리고 5월 23일 서울대.연대.고대 등 서울 5개 대학 학생 72명이 서울 미문화원에 진입하며 84년 하반기에서 85년 상반기에 이르는 소시기 학생운동을 극적으로 도약시켰다.
- 돌이켜 보면 84년 하반기~85년 상반기를 시점, 학생운동의 역동적인 저항은 당시 82학번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이들은 84년 3학년 신분으로 84년 상반기 정세에 대해 토론했을 것이고 84년 하반기 학생회 건설의 실질적 주역이며 85년 상반기 학생운동의 일대 도약을 일궈낸 주역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81학번과 82학번 사이에는 일정한 단층선이 존재한다. 전자가 80년대 초반 절망적인 저항을 통해 수난에 찬 반독재투쟁을 진행했던 세대라면 후자는 군부를 실질적으로 압박하며 범국민적인 민주항쟁에 도화선을 지핀 역사의 주역들이다.
- 지금은 어떨까? 87년 6월항쟁 이후 시작된 민주화세대는 95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2007년까지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08년 촛불시위가 시작되면서 학생운동은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고 10년 김예슬 등 도전적인 흐름이 출현하고 있다. 나는 촛불시위를 계기로 어딘가에서 81학번과 82학번을 갈랐던 단층선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배들과의 토론속에서 아마도 08학번이 그런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08년 1학년으로 촛불시위를 맞았고 10년 점증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3학년으로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이전 세대의 무기력과는 다른 촛불이 가르쳐준 진취적인 정신이 내재되어 있었다.
- 내 판단이 틀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08학번인가 10학번인가 하는 점이 문제일 뿐 역사에 단층선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이제 학생운동은 새로운 궤도위에 들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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