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청년회 모델의 몰락
- 서울지역 청년회를 중심으로
- 87년 6월항쟁 직후 나라사랑청년회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청년회들이 만들어졌다. 87년 6월항쟁은 첫째. 당시로 보면 소수의 명문대 중심의 학생운동을 비슷한 연배의 청년대중으로 확산시켰고 둘째. 80년대 중후반 이후 억눌렸던 청년대중의 문화적.정치적 요구를 분출시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치적.문화적 요구를 대변했던 청년회들은 91년 강경대 투쟁, 90년대 범민족대회에서 상당한 동원력을 발휘하며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96.97년을 거치며 통일운동에 중심을 둔 학생운동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학생신분으로 통일운동을 했던 청년들 중 일부가 이후 서울지역의 청년회에 모여들었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서울지역 청년회들이 이들의 참여에 의해 상당한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의 참가는 두가지 점에서 문제를 갖고 있었다. 첫째는 명확한 사회진출에 대한 의지없이 다소 낭만적인 관점에서 청년회에 참가한 점 둘째.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대한 대중적 평가를 거치지 않은 점이다.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청년회는 서서히 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다. 88년 나라사랑청년회가 확대된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 시기의 청년회는 점차 고조되는 사회적 고립을 수동적인 차원에서 수용했다.
- 이들이 나이가 들어 30대 초중반이 되고 신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직장에서의 압박이 시작되자 청년회의 활동 지반은 빠르게 유실되고 있었다. 이들은 애초부터 명확한 운동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 직장.결혼과 같은 생활이 이들이 청년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여력을 빼앗았다.
- 여기에 정치사상적 나태함과 나약함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서울지역의 청년회와 달리 지방의 청년회는 어쨌든 학생운동출신이 아닌 지역의 일반청년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울지역의 청년회가 착목했던 것은 청년실업 등이었는데 이들은 끝내 ‘한국청년센터’ 수준의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에 머물렀다. 덕분에 청년대중의 사회적 이해를 대변하는 활동은 청년유니온과 같이 서울지역 청년회와 전혀 무관한 다른 공간에서 출현했다. 또한 전통적인 통일운동과 청년실업운동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중간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전자는 ‘한국청년연대’에게 후자는 ‘청년유니온’에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다.
- 이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의미있는 행동이 나오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소위 운동조직을 표방하는 단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면 대책이 거의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어느 한 방향으로 결정을 짓고(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활로를 뚫으려 하지 않은 점이다. 서울지역 청년회는 누구의 탄압도 없이 저절로 주저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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