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9일 월요일

40대, 대졸, 전문직 빈곤

- 40대, 대졸, 전문직의 빈곤이 급증하고 있다는 현대경제연구원의 보고서

- 고학력 인텔리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실증 자료인 셈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역사의 동력

역사의 동력

 

황건적의 난, 태평천국의 난, 갑오농민전쟁 등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등장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역사의 동력인가?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민중들의 투쟁이 역사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 단 이를 자양분으로 하여 엘리트 집단 사이의 정치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만약 엘리트 집단 사이의 정치투쟁이 민중적 에너지를 자양분으로 하지 못할 경우 그것은 혁명, 변혁, 개혁과 같이 역사의 진보적인 역할을 하기보다는 엘리트 집단 사이의 정쟁이나 정변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는 표현은 역사 발전의 궁극적인 동력을 논할 때는 적당할 수 있어도 보다 구체적인 역사 공간에서 역사의 주체를 논하는 상황에서는 적절한 개념이 아니다.

 

역사의 진정한 위기는 사회적 모순의 격화, 민중적 에너지의 분출과 같은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자양분으로 하되 엘리트 집단의 균열에서 나온다.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면서 주류 엘리트 집단이 엘리트 사회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고 이들 중 일부가 혁신적인 사조와 결합하여 사회적 저항을 결행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삼국시대의 6두품이나 고려말 신진사대부 등이 그런 사례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의 위기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표징의 하나는 사회경제적 갈등의 심도와 함께 엘리트 집단 내부의 균열 정도이다.

 

지금은 어떤가? 로스쿨, 의치학 전문대학원 입시를 둘러 싼 경쟁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다. 서울의 명문대 출신 또는 재학생임을 강조하며 과외를 구하는 전단지가 곳곳에 나붙어 있다..............서울과 지방대를 가르던 선은 어느새 SKY와 서울의 중류권 이하 대학을 넘어 SKY 대학 내부로 확대되고 있다.

2010년 한국은 SKY 대학 출신자들에게 안정된 직장과 보수를 주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는 90년대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90년대에는 사법고시 정원이 늘어나고 민간기업에 좋은 일자리가 많아 그저 SKY라는 학벌만으로도 안정된 직장과 보수가 가능했다. 그러나 2010년의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갈등이 격화되고 탈락자가 많아지게 되면 이 중 일부가 혁신적인 사상과 결합하게 된다. 이로부터 운동은 새로운 단계와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2010년의 대한민국은 이 국면을 통과하고 있다.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친구들과 아들의 대화

친구들과 아들의 대화

 

어제 친구들과 술을 먹고 새벽 늦게 함께 집에 왔다. 친구들은 내 처지를 아는 터라 무척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아내와 이혼하고 아들은 자퇴했으며 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운동에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는 인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의 생활은 비참하거나 침울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이다.

 

새벽 3시가 넘어 집에 왔을 때 아들은 여전히 책을 보며 놀고 있었다. 평소에도 능글맞고 웃음기가 넘치던 아들은 자퇴하고 나서 더욱 밝고 명랑해졌다. 아들이 보여주는 쾌활함이 친구들이 보기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이혼하기 전 아들에게 이혼해도 괜찮겠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이혼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지라 그저 심상하게 물었다. 당시의 아들의 반응도 그랬지만 어제 대화에서 아들은 그저 30초 정도 고민했다고 한다. 이혼한 부부의 자녀가 갖고 있을법한 어두움을 아들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아들은 분명 기존 한국사회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이다. 나도 자유분방한 인간이지만 아들은 나의 수준을 뛰어 넘어 자유분방함을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렇게 사회도덕과 인간의 풍모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15세기 서유럽의 부흥을 이끌어낸 것은 이성과 합리성을 지닌 개인이다. 사람들은 이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15세 이전 역사에서 위와 같은 유형의 인간상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1848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라는 특별한 새로운 집단을 찾아내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역사관을 제기한다.

 

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체현할 특별한 집단이 출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참여연대 등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할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김예슬에 환호하는 것은 바로 그가 체현한 시대적 높이 때문이다. 김예슬이 어떤 인생을 살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예슬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도전은 서서히 그러나 막을 수 없는 속도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2010년 4월 15일 목요일

20대 후반 남자의 고용상황

- 고용 취약지대는 20대 후반의 남자, 30대 초반의 여자, 65세 이상의 노인

 

- 20대 후반의 남자의 경우 00년 고용률 78.3%에서 09년 69.4%로 -0.9%나 감소

  같은 기간 20대 후반의 여자는 00년 53.7%에서 65.6%로 11.9%나 급증

 

- 남자들의 고용이 줄어든 것은 이른바 괜찮은 일자리(30대 대기업 등)가 줄어드는 가운데 취업준비생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

 

- 주로 대졸을 대상으로 추적, 20대 후반 고졸 남성에 대한 보완이 필요함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이인영에 대한 회고

이인영에 대한 회고

 

이인영은 87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1기 전대협의장을 지냈고 04년 서울 구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인간 이인영의 궤적은 운동가들의 행보와 관련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인영은 고려대 국문과 84학번으로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국회의원이 되기 어려운 커리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6월항쟁과 거기에서 전대협이 했던 역할 때문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05~06년 무렵부터 운동진영에 전문성을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여기에는 첫째. 운동진영이 점차 제도화되면서 전문성이 결합되어야 하는 내적인 필연성 둘째. 조직행동 중심의 풍토를 반성하며 운동에 과학성을 접목하려는 시도 등이 작용했다. 06년부터 진보진영에 연구소 붐이 일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운동에 전문성을 도입하려는 시도와 개인적 진로 문제가 결합되면서 뒤늦게 대학원.각종 고시 등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제도권 진입에 대한 뒤늦은 후회, 운동가의 바람직한 미래상에 대한 변화(이전에는 대중성.전투성 등이 중요한 덕목이었다면 향후에는 전문선+현장성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 등) 등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위 이인영의 사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시대적 추이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다. 05~07년 노무현 정권의 몰락, 운동진영의 쇠퇴와 함께 부상했던 이른바 전문성에 대한 갈구(?)는 어떤 시기의 산물이다. 그것은 MB 정권 등장 이후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여 진보진영의 토대를 튼튼히 닦으려는 장기적인 안목의 소산이다. 그러나 상황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 정세는 먼 미래의 무엇이 아니라 향후 몇 년안에 민중의 요구를 간명하고 함축적으로 대변할 무언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시기 중요한 것은 이론적 정합성을 갖는 전문성이 아니라 대중의 이해를 실물화하는 구체적인 슬로건이다.

 

이러한 상황은 각 개개인에게 적용된다. 기득권층의 헤게모니가 강력하고 진보진영의 발전이 대단히 느리게 전개된다면 차분히 전문성을 쌓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제도권 진입의 문이 좁아지고 있고 결집을 요구하는 민중적 요구는 거세지고 있다. 이럴 때라면 민중적 요구를 대변함을 통해 새로운 방향에서 제도권 진입을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진보진영은 허송세월을 했다. 각 운동가의 입장에서 10년은 천금과 같은 시간이다. 30~40대 청년시절의 10년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속에 뒤늦게 제도권의 문을 두드리려 하지만 이미 제도권의 벽은 빠르게 닫히고 있다. 뒤늦은 후회가 10년 후 또 다른 후회를 부를 위험한 선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럴 때일수록 비제도권에서 자신의 활로를 구하는 역선택이 필요하다.

 

80년대 중하반 한국사회를 수놓은 전대협의 힘은 이인영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 향후 한국사회를 강타할 힘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어설프게 제도권을 귀웃거리기보다는 새로운 파워의 진원지와 결합해 대중적 힘으로 인생을 새롭게 열자.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통일뉴스의 딜레마

통일뉴스의 딜레마

 

내가 통일뉴스를 처음 안 것은 00년 6.15 선언 직후이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이던 나는 6.15 선언 이후 확대된 공간에서 최대한 공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통일뉴스와 만났다. 6.15 선언이 나왔어도 범민련의 운신의 폭은 작았다. 통일운동의 중심이 정부와 제도권으로 옮겨간 조건에서 범민련의 활동공간은 역으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뉴스는 범민련이 했던 기자회견 등 사소한 통일행사들을 보도해 주었다.

 

03년 범민련 사무처장을 두 번째 구속된 이후 나는 통일뉴스에 ‘통일운동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감옥에서는 책을 보는 것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과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글이 지면에 실리고 그렇게 활자화된 기사가 다시 내게 전달되는 과정은 남다른 즐거움이었다. 아마도 이 시기 통일뉴스가 내게 준 배려와 관심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08년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통일뉴스는 구조적인 딜레마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00년 이후 10년 동안 통일뉴스는 통일부.외교부 등을 드나들며 제도권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통일뉴스가 보유한 정보의 양과 질은 통일운동 단체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다. 단 그것을 가공.포장하는데 미숙하여 통일뉴스가 쌓아 올린 성과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운동 단체들은 통일뉴스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쌓아올린 정보를 활용하기보다는 자신들 수준에서 나온 정보에 자족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통일운동 일선에 몸담은 바 있지만 통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감과 정보이다. 통일운동 단체들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통일뉴스.민족21 등이 축적한 현장감과 정보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통일운동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는 제도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통일운동의 거점들(통일뉴스, 민족21, 겨레하나 등)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통일운동단체들은 통일운동의 성과물을 잘 소화하고 지키려 하기보다는 여전히 골방에서 회의나 하고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소모적인 사업을 남발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논조이다. 98~00년 이후 통일공간이 빠르게 열리면서 원칙과 기조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자주통일운동은 보다 정치한 논리와 대국적인 안목이 필요한 시점으로 발전하고 있다. 통일운동단체들은 이러한 시대의 추이를 반영해 자주통일노선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통일뉴스의 상당수 독자들은 한호석류의 소설같은 이야기나 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하고 있다. 통일뉴스의 최대 딜레마는 통일뉴스가 제도권에 진입하며 축적했던 정보와 그에 수반한 통일기조와 통일뉴스의 최대 고객인 전통 통일운동 진영의 요구가 상호 맞지 않고 있는 점이다. 후자는 점차 비이성적인 괴물집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개중의 상당수는 이미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non을 정리하며

non을 정리하며

 

  나는 며칠 전 마음속으로 non을 정리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민주노동당 당적도 정리할 생각이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리 운동이 한 단계 도약해야 하며 non도 그 길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으면 하는 바램은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나의 이런 바램은 한편으로 김예슬과 같은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하는 과정,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동당의 사상적 몰락을 지켜 보며 더욱 절실해졌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년간 나는 non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nl 이론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고 진보운동의 새로운 세대와 함께 하기를 희망했다.

nl 이론의 현대화 작업은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nl 이론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정리됨에 따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나는 70~08년 한국경제사를 다룬 책을 거의 탈고 중이고 올해 안에 1~2권 정도의 책을 더 쓰게 될 것이다. nl 이론에 대한 현대화 작업이 무색할 만큼 정세가 급변했고 그 속도 만큼 나도 많이 성장했다. 사상이론적으로만 보면 지난 몇 년보다 지난 몇 개월이 훨씬 풍성하고 유익했던 시간이다.

새로운 세대에 대한 바램은 기대했던 것보다 크게 못미쳤다. nl 대오는 생각보다 사상적으로 무력하고 고집스러웠다. 껍데기만 남은 생각을 지키려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 없다. nl 대오의 무력함이 도드라진 사이 진보운동의 전통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흐름이 터져 나오고 있다. 나는 전자와 후자가 보여주는 시대적 격차에 경악하고 있다. 전자를 개조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립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한다. 이 길은 시대에 맞는 현대적인 노선과 강령을 수립하는 과정이고 참신한 대중운동을 실험하는 과정이며 진보정치운동을 새롭게 발기하고 조직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은 11년 하반기에서 12년 상반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會者定離, 이것이 나의 좌우명이다. 만난 것은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고 낡은 질서는 새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어렵기는 했지만 나는 이 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헤어져야 할 것에 미련을 두는 순간 우리는 구차하고 지루한 만남을 갖게 될 것이다. 만남은 언제나 새로워야 하며 진보는 언제나 역동적이어야 한다. 내가 선택한 또 하나의 갈랫길이 흥미있고 풍성하기를 바란다.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발전을 위해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02년 지방선거에서 정당비례 득표 8%를 넘음에 따라 진보정당운동은 본궤도위에 올랐다. 02년 대선에서는 100만표에 가까운 득표를 통해 확고한 대중적 지반을 갖췄다. 03~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과 역풍’이라는 정치적 격변을 배경으로 치러진 4.15 지방선거에서 지역구 2석, 비례 8석을 얻음으로써 민주노동당은 바야흐로 원내정당이 되었다.

 

00~04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제도권 진입과정은 신자유주의 폐해가 본격화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00년 3월 미국 나스닥이 폭락하면서 00년 4/4분기 실질 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졌고 03년 가계신용을 조이기 시작하자 03년 1/4분기 실질 GDP 성장률이 다시금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이 과정은 가계신용을 통한 민간소비 유지와 가계신용 억지에 따른 민간소비 급락이 반복되면서 서민경제가 나락으로 빠져들던 시점과 일치한다.

이 시기 노무현 정부는 4대개혁입법 투쟁 등 중요하지만 근본적이지 않은 쟁점에 매몰되어 있었고 민주노동당 또한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05년 이후 00~04년 남북정상회담, 탄핵과 역풍과 같은 마취주사(?)가 사라지자 서민생계 악화에 시달리던 대도시 중서민 대중이 대이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고 정동영 후보가 대참패하였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은 05년 이후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사표심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07년 대선에서 71만표에 그쳤다. 이는 선거 직전인 8.23 급조된 문국현 후보가 얻은 173만표, 5.8%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국현 후보에게 간 173만표의 성향을 보면 민주노동당이 대도시 20~30대에게 어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07년 대선 직후 내부 책임 공방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분당되고 말았다. 이는 대선을 통해 확인된 민심이반을 수용하기는커녕 민심을 수렴할 정치적 근거지 자체를 둘로 쪼개는 어리석은 행보였다.

그 이후 진보양당은 08년 촛불, 09년 서거정국 등에서 민의를 수렴할 기회를 놓친 반면 05~08년 4월 총선까지 대중의 심판을 받았던 민주당.국민참여당이 09년 서거정국을 통해 반MB, 반한나라당의 대안세력으로 부상했다.

한편 08년 촛불에서 시작된 대도시 청년과 중서민 대중의 반격은 10년 들어 김예슬.무상급식.김용철 변호사 사건 등을 계기로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6.2 지방선거는 위와 같은 환경에서 벌어진다. 현 정세는 대체로 08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반MB-민주당지지’, ‘07년 분당과 민심이반’의 연장선하에 있다. 따라서 선거 결과는 ‘MB 패배-민주당 승리-진보정당 고전’이라는 흐름속에서 결정될 것이다.

진보정당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진보정당 고전’이라는 정세적 흐름이라기보다는 07년 대선 이후 내부 혁신과 단합에 실패한 점이다. 민주노동당은 패권적 행태를 버리지 않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갈지자 행보(종북주의를 명분으로 한 분당 강행, 진보신당의 고립을 통한 민주노동당 독자 진보정당과 반MB....)를 거듭했다. 패권적 행보와 무원칙한 정치방침을 관통했던 것은 이른바 당권파들의 권력의지이다. 한편 진보신당의 경우 기본 세력 자체가 열세인 조건에서 일부 분열적 좌파 인텔리들의 농간, 심.노 등 스타급 정치인들의 얄팍한 잔꾀가 결합되 사실상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07년 대선 결과가 진보정당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07년 대선 결과를 수용하는 양당 지도급 세력과 인물의 무능이 사실상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정치적 메커니즘 자체를 붕괴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00년 본격화된 진보정당운동은 07년 대선과 10년 지방선거를 거치며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반면 진보정당운동의 주객관적인 필연성은 오히려 명확해지고 있다. 서민생계를 파탄으로 몰아간 신자유주의는 극적으로 파열되었고 10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유형의 저항 세력은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맹아가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6.2 지방선거 이후 진보정당운동은 정치적 영향력이 와해되고 있는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궁지에 몰린 진보신당 당권파를 한축으로 하고 새롭게 발흥하는 진보정치 세력을 또 다른 축으로 하는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전자가 07년 대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파의 헤게모니를 위해 진보정당운동을 농락했던 만큼 핵심은 후자의 성장 정도에 달려 있다.

 

6.2 지방선거를 앞둔 민주노동당의 행보는 노골적인 비판적 지지를 통한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정치적 생존에 목전이 있는 듯 하다. 이를 위해 그들은 진보신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행보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진보신당이나 창조한국당은 집권 세력의 유치한 행보와 무관하게 대도시 인텔리, 청년층이라는 객관적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다. 두 정당이 사라진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에 거리를 두고 있는 대도시 인텔리, 청년층이 민주노동당에 합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민주노총 등 주요 대중조직이 양당의 단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당과의 어설픈 연대가 아니라 진보신당과의 후보조정과 대연합이다. 그리고 그 초점은 07년 이후 날로 해악을 더해 가고 있는 민주노동당 당권파를 견제하는 것이다.

 

6.2 지방선거 이후에는 새로운 형태의 진보정당운동이 가시화될 것이고 올 하반기부터는 12년 4월 총선을 목표로 한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시작될 것이다. 6.2 지방선거 이전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진보신당 고립전략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6.2 이후에는 10년 4월 총선을 목표로 NL도 PD도 아닌, 민주노동당도 진보신당도 아닌 시대에 걸맞는 현대적인 강령을 갖추고 다양한 제 집단과 정파를 총망라하는 새로운 유형의 진보정당을 만드는 데로 집중해야 한다.

 

 

2010년 4월 10일 토요일

09년 여성 고용 현황......노동부

“노동부, 09년 여성 고용동향 분석”(10.3.8)

 

- 15세 이상 여성 인구는 22.3만명 증가, 이 중 취업자는 -10.3만명, 실업자는 4.0만명, 비경제활동인구는 28.6만명

* 22.3=-10.3+4.0+28.6

 

- 09년 여성 취업자는 08년에 비해 10.3만명 감소, 같은 기간 남성 취업자는 3.1만명 증가..............경기불황이 여성에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

 

- 구체적으로

* 비임금근로자(자영업자)가 19만명 감소, 특히 자영자(혼가 가게를 운영하는)가 11.9만명 감소, 무급가족종사자는 6.6만명 감소

* 연령별로는 15~29세 -7.4만명, 30대 -10.6만명, 40대 -1.2만명, 50대 8.0만명, 60세 이상 0.9만명

* 학력별로는 고졸이하 -19.3만명, 초대졸 1.1만명, 대졸이상 7.9만명

* 산업별로는 제조업 -11.0, 숙박및음식점 -10.3, 공공행정업 10.9, 보건복지 14.0

* 전문가및관련 6.7만명, 사무종사자 -0.5, 서비스종사자 -12.2, 단순노무종사자 9.3

* 비경제활동인구 28.6만명인데 이 중 육아가사 18.6만명 증가

 

- 특징

* 경기가 악화되면서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고졸 정도의 학력을 가진 30대 여성, 공장에 다니는 고졸 정도의 20~30대 여성이 집중적인 타격을 받음

* 취업을 하지 못한 인구가 실업자(08년에 비해 4.0만명 증가)로 가기보다는 비경제활동인구(+28.6만명) 중 육아가사(18.6만명)로 이동, 무급가족종사자.임시직.단시간근로자 등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여성 증가

* 50대 공공근로를 하는 중고령 여성을 제외할 경우 취업자 감소폭은 -21.1만명 수준

2010년 4월 9일 금요일

관상에 대하여

관상에 대하여

 

관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용모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운명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제도권 교육을 배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견해를 쉽게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관상은 그렇게 간단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애니어그램이라는 심리학 분야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중앙신경조직, 순환계, 소화기를 많이 쓰는 3그룹으로 나누고 각각을 사고형, 감정형, 장형(현실형) 등으로 구분한다. 이를테면 중앙신경조직을 많이 쓰는 사람은 외부에서 알아볼 수 있게끔 두뇌조직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사고와 감정의 패턴도 특정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사람의 생김새, 걸음걸이, 눈매 등만 보아도 그 사람의 감정상태를 짐작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운명까지도 점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애니어그램에서 인간의 외모와 감정상태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양자 사이에 상식적인 생각보다 훨씬 높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관상 등을 쉽게 무시해 버리는 습성은 첫째. 제도권 과학이 종교와 같은 비합리주의를 극복하며 나왔고 둘째. 특권적 지위를 무시하고 사람들 사이의 평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무의식, 유전학, 통계학 등의 영역에서 보다 인식 수준이 높아지게 되면서 이전에는 합리적인 세계밖의 영역으로 치부했던 문제들이 과학의 영역으로 흡수된다. 의학에서는 정신병, 사회과학에서는 종교 등의 영역이 학문적 고찰의 대상이 된 것이 이러한 사례이다. 애니어그램의 경우도 시원은 고대 이슬람의 수피즘이 뿌리라고 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자연적 차이, 백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인종주의, 배타주의, 남성우월주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남성 여성의 성적 차이, 인종적.민족적 차이, 다양한 인간유형의 감성적 차이를 가능한 억제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해 온 것은 특권 또는 극단주의를 억누르고 사회적 안정을 이룩하려는 사회적 노력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일정 수준의 평등이 보장되고 나면 인간의 개성을 중시하고 인간 내면을 보다 섬세하게 다루는 경향이 강하지게 된다. 애니어그램.MBTI 등의 인간유형론이 발전하고 남성성.여성성 따위를 인정하고 이를 발현해 주는 형태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점은 첫째. 대체로 70년대의 제도 교육이 인간의 개성보다는 기계적인 평등과 초보적인 지식 습득을 목적으로 했다면 90년대는 객관 대상에 대한 섬세하고 종합적인 이해와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는 형태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제도권 교육이 갖는 압도적인 영향력에 비춰 보면 70년대와 90년대 제도권 교육수주의 차이는 동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수준 차이로 남아 있는 듯 하다. 70년대 제도권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평균적인 도덕률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다 개성있고 풍부하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사회변화가 빠르게 나타나면서 평균적인 도덕률이 곳곳에서 파열되고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타파하려는 진지한 노력들은 지체되고 있다. 혈연가족이 붕괴된 조건에서 교육받는 중산층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기보다는 적당히 전통적인 관계에 안주.방치하면서 빚어진 부모-자식 세대의 갈등 등이 그런 사례이다.

 

관상 등의 전통 지식을 애니어그램과 같은 현대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내면 세계를 바꾸려는 노력을 보다 혁신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너무 보수적이다. 어쩌면 사회관계를 개편하려는 노력보다 이것이 보다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2010년 4월 8일 목요일

대학진학률.........일독을 권함

- 90년 30% 수준이던 대학진학률이 00년 80%대까지 상승, 이후에는 정체, 이는 80~85년 사이 출생자수가 80만명 수준에서 60만명대로 낮아진 것과 연관

 

- 서울.경기.인천의 대학진학률이 낮은 것은 이전 시기에는 대학 진학 자체가 목표였다면 00년 이후에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목표로 변했고 이 경쟁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음

 

- 08년 이후 수도권의 청년세대의 정치적 진출에는 위와 같은 배경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음

 

 

소방차와 서태지에 얽힌 추억

소방차와 서태지에 얽힌 추억

 

소방차가 처음 나왔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당시에는 남자가 춤을 춘다는 것이 무척 낯선 장면이었다. 그런데 가벼운 몸짓도 아니고 세 명이 떼거지로 나와서 노래보다는 춤에 어필하는 장면은 감각적으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서태지의 노래는 더욱 그랬다. ‘난 알아요’하는 노래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따라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또는 우리 세대)가 소방차와 서태지에 익숙해진 것은 그로부터 한 참 지난 후의 일이다.

 

정보통신문화도 그렇다. 87년 6월항쟁 당시 우리는 수동 타자기로 작업했다.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나는 워드프로세스를 거쳐 컴퓨터가 나오는 과정에 뒤쳐져 있었다. 뒤늦게 컴퓨터 로 작업을 하고 내가 작업한 내용이 프린터로 인쇄되어 나오는 과정에 환호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하얀 인쇄지에 말끔하게 정리된 원고가 흘러 나오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컴퓨터 창을 두 개 열어놓고 작업을 한다. 하나로는 영화를 보고 다른 하나로는 만화를 보는 식이다. 여기에 더해 컴퓨터 책상에서 밥을 먹고 어떨 때는 책까지 본다(미친 놈^^^) 아들 녀석이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는 바이킹을 보는 것 같다. 아들에게 컴퓨터는 바이킹의 바다와 같은 존재인 듯 하다.

 

08년 대선 직후 진보연대 주최 토론회에서 모모씨는 사이버 공간에 개입해야 한다며 이를 전개할 팀을 꾸리겠다고 밝혔다. 이에 참가자 중 한 사람이 그런 발상 자체가 사이버 공간의 문화와 다른 것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돌이켜 보면 진보연대라는 조직 자체가 이미 온라인 공간과는 양립하기 어려운 구세대의 발상이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시대를 하나로 조합하려고 했던 모모씨는 10년 서울 생활을 마치고 최근 낙향했단다. 그가 살았던 10년을 기억하는 나로써는 시대와 부합하지 않는 인간의 쓸쓸한 말로를 보는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이른바 세대 차이이다. 기회를 봐서 나중에 쓰겠지만 현 88만원 세대(이게 맞는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는 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386 출신의 활동가들에 비해 비할 바 없이 똑똑하다. 봉건적 잔재가 짙게 남아있던 70년대 암기식 교육을 받고 자란 386세대에 비해 88만원 세대는 현대적이고 체계화된 교육을 받고 자라 지적 수준 자체가 대단히 높다. 이런 실력 차이는 노력을 통해 극복한다고 치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앞서 말한 세대 차이이다. 이것은 노력을 통해 좀처럼 극복할 수 없는 시대의 벽이다. 조선시대라면 삼강오륜 따위의 도덕률의 절대 가치일 수 있다. 그러나 현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케케묵은 과거의 일이다. 이 차이는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다. 옛날이라면 시대의 차이는 대략 30년쯤의 한 세대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광속과 같이 빠르게 발전하는 현 시점에서 시대적 감수성은 ‘노인-중고령-장년-청년-청소년’ 등 10년 심지어는 5년 단위로 차이가 난다.

 

현재 진보운동은 아직도 87년 6월항쟁에 발원한 가치관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하에 있다. 산술적으로 87년 6월항쟁은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의 일이다. 아마도 이 시간안에 적어도 서너 세대의 시대적 감수성이 역사의 단층선을 이루며 충돌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미 꼰대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는 형식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시대의 격차를 메꾸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작업일 듯 하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미래를 대표하는 집단의 성장 속도 만큼 진보운동의 활력이 생기는 법이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7일 수요일

차베스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차베스를 보는 또 하나의 시각

 

  98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베네주엘라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반미강경노선,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 포퓰리즘, 유가 상승 등등일 것이다.

02~07년 중국의 대 개도국 투자.원조액을 보여주는 아래 표는 차베스를 평가하는 또 다른 시각의 단초를 보여준다.

 

  아래 표에서 보듯 중국의 베네주엘라 투자.원조액은 164억불에 이른다. 이는 2위인 브라질의 꼭 2배에 이르는 숫치이다. 흥미로운 것은 02~07년 중국의 베네주엘라 투자.원조가 대규모로 진행되는 동안 차베스는 02년 4월의 쿠테타 등 아슬아슬한 권력투쟁에서 시종 우위를 지켰다는 점이다. 물론 이 정치적 우위의 배경에는 베네주엘라의 석유가 있다. 사람들은 베네주엘라가 원유 보유국.수출국이었음을 중시하곤 하지만 진실은 그것 이상이다.

 

  원유 보유국.수출국이라고 해서 언제나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은 아니다. 70년대 중동의 자원 민족주의는 서방선진국의 에너지 효율이 높은 산업으로의 재편(원유 수요 감소), 중동 기득권층이 석유 수입을 소수 기득권층에 귀속시키거나 서방은행으로 환류시킨 점, 이 자금이 한국.브라질 등에 차관으로 제공된 점 등등 미국 질서를 재강화하는데로 귀결되었다.

 

  베네주엘라의 석유가 위력적이었던 것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피말리는 에너지 전쟁의 구도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의 봉쇄망을 뚫고 어떻게든 에너지 수요를 충당하려고 노력했고 이것이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 대한 중국의 거대 원조와 투자를 이끌어낸 동인이다. 이를 배경으로 차베스는 미국이외의 다른 에너지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고 이것이 차베스가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강력한 동력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중남미가 탈미적 노선을 강화해가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 중동, 구소련 등에서 탈미적 노선이 강화되는 것과 동일한 맥락의 사건이다. 미국의 자산버블은 중국의 거대 고정자산투자와 막대한 자원 수요를 창출했고 미국적 질서에 편입되기를 거부했던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에너지 질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에너지 질서를 구상했다. 그리고 그 연장선하에서 중남미 등의 탈미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과 일진일퇴하는 차베스를 그리는 것은 차베스를 둘러 싼 객관적인 정치지형을 무시하는 것이다. 차베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이 만들어낸 거대한 에너지 수요가 의미있는 변수로 고려되어야 한다. 차베스를 보는 하나의 시각은 반미전선의 선봉자이지만 신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는 가운데 제 3세계에서 발생한 국지적 저항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더 실체에 가깝다.

2010년 4월 6일 화요일

꿈틀대는 욕망

꿈틀대는 욕망

 

-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반MB연대냐 진보대연합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논쟁을 정치노선을 둘러 싼 갈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논쟁의 핵심은 정치노선이라기보다는 40대 중반을 넘어선 운동가들의 실존적인 고민이다.

 

- 당신이 만약 40대 중반을 넘어선 활동가라면 현재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생각할 것으로 보는가?

동창회를 나가면 친구들이 묻는다. 친구들 또한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등의 국회의원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마냥에 당연히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의 근황이 궁금할 것이다. 누구누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데 너는 어떠냐고... 이런 질문이 친구가 아니라 부모친척 등에서 나오면 대화는 훨씬 날카롭고 예민해진다.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운동이외에 달리 갈 길도 없다. 일반 직장에서도 명퇴를 하는 판에 20~30년간 운동만 해온 처지에 어디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민주노동당이 주는 일정한 보수는 20~30년간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큰 돈이다.

40대 중반이 넘어 이혼을 하는 것은 대부분 돈 때문이다. 부부 중 한쪽이 교사이거나 약사 같은 특수직(?)이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 하중은 만만치 않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경제적 문제는 피해갈 수 없다. 부부간의 애정과 신뢰, 무한한 헌신도 어느 정도지 어느 수준을 넘어 임계치에 이르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갈등이 불거지게 마련이다.

............

 

- 위와 같은 문제들이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없을거라고 보는 것이 이상한 생각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에도 당연히 자신의 이해관계가 개입되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가 그 사람의 경제적 처지에 기반한다는 것은 운동가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단 그 정도가 약할 뿐이고 어떤 경우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 많다는 것 뿐이다.

 

- 지금은 어떨까? 6월항쟁에 뿌리를 둔 대중조직들은 대부분 와해되고 있다. 당연히 그에 기반을 둔 40대 중반의 활동가들이 이들 대중조직을 토대로 운동적 신념과 경제적 기반 나아가 일정한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말끝마다 MB심판을 외치지만 20~30년간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이 이러한 정세 변화를 모를 것으로 보는 것은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이다.

00년 이후 진보진영에게 열렸던 이른바 명예로운 제도권 진입의 길도 빠르게 닫혀 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무능한 사람들이 닫혀가는 좁은 문에 더욱 집착하게 마련이다. 나름대로 자기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좁은 문에 집착하는 정도가 작거나 다른 길을 모색할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경향은 비단 한 사람의 운동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써클이라는 집단도 큰 틀에서 보면 한 사람의 인간이다. 써클이라는 집단은 사람이 많을수록 특히 상층부에 복종하는 순종형 인간들이 많을수록 챙겨야 할 식솔이 많은 법이다. 이럴 경우 일정한 경제적 보상이 따르는 지위를 통해 자기 식솔을 챙겨야 하는 내적 요구가 강해지는 법이다.

 

-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00년 이후 극적으로 부상했던 진보진영의 40대 중반을 넘어선 활동가 부대가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 무너져 내리는 틈바구니에서 닫혀가는 마지막 문을 향해 절망적인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아귀다툼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반MB이다. 물론 반MB라는 정치노선은 국민적.대중적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지지를 경멸하며 떠올랐던 진보정치 집단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신자유주의를 그렇게 목청놓아 비판했던 사람들이 일순간에 노골적인 비판적 지지에 경도되고 있는 것은 밑으로부터 실존적 욕망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MB퇴진을 목놓아 외쳤던 사람들이 정작 김진숙.김예슬이 보여 주었던 명료한 투쟁 한번 보여주지 못한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들의 관심이 반MB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5일 월요일

해외건설 수주액

인구

1980년 2000년 2050년
실측치 실측치 OECD 추계 통계청 추
0~4 4033727 3259783 1436088 1159021
5~9 4458426 3521464 1546626 1238746
10~14 4458622 3129982 1666835 1365314
15~19 4519689 3842432 1802831 1558454
20~24 4093407 3854382 1966224 1732074
25~29 3072797 4352913 2031119 1762002
30~34 2525214 4247992 2060808 1818163
35~39 2279565 4273079 2287228 1954366
40~44 2178570 4020438 2455690 2059522
45~49 1756088 2921443 2638371 2363378
50~54 1324926 2365862 3049405 3020697
55~59 1130835 2006389 3274121 3239690
60~64 835876 1817056 2851061 2915585
65~69 623957 1381212 3366945 3380238
70~74 425995 922213 3162086 3303187
75~79 2277859 608084 3150495 3342112
80~84 118991 310114 2504979 2754701
85이상 59231 173273 3086085 3375519
총인구 38123802 47008111 44336997 42342769

원샷을 보고

걸판 정기공연 ‘원샷’을 보고

 

- 걸판의 4회 정기공연작 ‘원샷’을 보았다. 공연은 시종일관 재미있었다. 만만치 않은 주제를 절묘한 웃음을 곁들이며 이끌어 가는 솜씨는 예술집단으로서의 재주와 끼를 느낄 수 있었다.

 

- 그러나 아쉽게도 공연은 시종일관 애매하고 복고적인 설정이 지속되었다. 이별한 노부부의 만남, 국가보안법을 둘러 싼 해프닝, 지리산을 둘러 싼 빨치산과 국군의 화해 등이 그러하다. 이들 주제는 통일관련 예술작품에서 거의 20년 동안 지속되었던 문제이다.

 

- 그럼 정말로 통일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객관적으로 소진된걸까? 통일정세를 개괄하면 88~92년 냉전 붕괴, 90년대 중후반기 미국 주도 일극질서, 2000년 이후 부시에 의한 반동화와 정세의 역전 그리고 현재는 대격변을 목전에 태풍전야의 고요쯤으로 개괄해 볼 수 있다. 통일정세는 대단히 구체적인 방안과 결단을 요구하는 긴박한 시점으로 접어 들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미국의 퇴조와 오바마 행정부의 무기력,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핵실험과 경제위기 그리고 권력교체기, 북중관계의 심화, 남측 정치지형의 변화 등 현실의 과제가 목전에 차 있다.

논의의 진전을 위해 필자의 견해를 시론적인 차원에서 요약하면 첫째. 북미관계를 시급히 끝내야 한다. 주한미군의 지위와 관련해 전향적인 양보를 하더라도 북미관계를 협상과 타협의 관점에서 해결해야 한다. 미국의 악의적 무시(?)가 지속되거나 북한이 일종의 묵시적 금기사항인 핵확산을 추진하여 상황이 위험한 국면으로 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북미 관계 개선과 함께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남북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는 남한 경제위기의 일정한 탈출.북한 자원의 활용.북한경제위기의 극복.북한의 불필요한 중국 경사의 완화 등을 해결할 수 있다.

 

- 반면 남에서는 통일운동과 관련한 위험한 사조들이 자라고 있다. 첫째. 한호석류의 환상적인 대북관이다. 이러한 견해는 소설과도 같은 비현실적인 관념을 유포하여 남한 정세에 실망한 일부 급진대중을 위안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그 만큼 합리적이고 설득력있는 통일논의의 확산을 저해하고 있다. 둘째. MB 정권 이후 통일정세의 역전을 심각하게 본 나머지 이전 시기 김대중-노무현류의 통일관을 무원칙하게 수용하는 경우이다. 대다수의 통일운동 세력이 어떻게든 통일정세를 회복하려는 희망하에 시대에 걸맞는 진취적인 통일관을 새롭게 개척하기보다는 98~07년 좋았던 정세를 회고하는 듯한 복고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원샷’의 시야 또한 대체로 여기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셋째는 98~07년 통일정세가 유리했을 당시 제도권에 나름대로 안착한 통일뉴스.민족21.겨레하나 등 통일매체나 단체들이 위 두가지 흐름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점이다.

 

- 통일정세는 난관에 봉착한 듯 하지만 대중적 통일운동이 성장한 이래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동북아시아 정세의 거대한 지각의 변화이지 이명박 정권이나 보수세력이 시대에 반하여 벌이는 笑劇이 아니다. 새로운 안목에 기초해 시대를 개척해야할 통일운동이 복고적인 입장에서 좋았던 과거를 반추하거나 몽상적인 통일관에 경사되고 있는 경향은 정세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통일운동이 이를 적극적으로 추동.개척할 역량을 상실했음을 뜻한다.

 

- 너무나 즐거웠고 예술가적 감성과 성실성이 엿보인 ‘웟샷’에서 필자가 유달리 공허함을 느낀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10년 4월 3일 토요일

6.2 지방선거

- 6.2 지방선거를 둘러 싼 정치적 기조를 지나온 정세와 경제를 중심으로 정리 해봄

남녀 임금격차

81학번과 82학번을 가르는 선

81학번과 82학번을 가르는 선

 

- 80~83년 학내에 전경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잠재적 저항 세력인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늦추지 않았다. 이를 배경으로 80~83년 절망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아마 당시의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을 쉬 몰아낼 수 없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저항을 계속한 것은 80년 광주가 이미 승패를 넘어 하나의 신념으로 소화되었기 때문이다.

 

- 84년 초 대학내에 전경병력이 철수하면서 상황은 빠르게 반전되기 시작했다. 84년 상반기 학생들은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경찰병력이 철수한 공간에서 한학기를 머뭇거리며 시간을 흘려 보냈다.

2학기 들어 상황이 명백해지자 서울의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회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이 흐름은 예상을 뛰어 넘는 호응을 불러 일으키며 학생들을 빠르게 결집하기 시작했다. 서울대의 경우 이정우 선배가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해 선풍을 일으켰고 이에 당황한 경찰은 이정우 선배에 수배령을 내린다. 이에 저항한 당시 1학년 학생들의 시험 거부 투쟁이 벌어진다.(나는 당시 1학년으로 이 어설픈 시위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학생회에 결집했던 선배급 학생들과 1학년 사이의 괴리는 컸다. 1학년들의 시험거부 투쟁은 전두환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된다.

이 교착국면을 돌파한 것인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 중앙당사 농성 사건이다. 이후 수많이 진행된 점거 농성의 효시쯤 되는 이 사건은 시험거부 투쟁 이후 느슨했던 학내 분위기를 일신하며 85.2.12 12대 총선에서 학생운동이 대도약하는 계기를 만든다.

 

- 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학내에서 경찰력이 약화된 데 이어 유세공간에서 경찰병력의 노골적인 압박이 느슨해졌다. 이를 배경으로 억눌렸던 민심이 대폭발하기 시작한다. 85.2.12 총선의 열기는 85년 상반기 서울의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전국 대학에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85년 5월 18일(?) 서울대는 무려 5000명이 참가하는 교문싸움이 4시간 이상 벌어졌다. 그리고 5월 23일 서울대.연대.고대 등 서울 5개 대학 학생 72명이 서울 미문화원에 진입하며 84년 하반기에서 85년 상반기에 이르는 소시기 학생운동을 극적으로 도약시켰다.

 

- 돌이켜 보면 84년 하반기~85년 상반기를 시점, 학생운동의 역동적인 저항은 당시 82학번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이들은 84년 3학년 신분으로 84년 상반기 정세에 대해 토론했을 것이고 84년 하반기 학생회 건설의 실질적 주역이며 85년 상반기 학생운동의 일대 도약을 일궈낸 주역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81학번과 82학번 사이에는 일정한 단층선이 존재한다. 전자가 80년대 초반 절망적인 저항을 통해 수난에 찬 반독재투쟁을 진행했던 세대라면 후자는 군부를 실질적으로 압박하며 범국민적인 민주항쟁에 도화선을 지핀 역사의 주역들이다.

 

- 지금은 어떨까? 87년 6월항쟁 이후 시작된 민주화세대는 95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2007년까지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08년 촛불시위가 시작되면서 학생운동은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했고 10년 김예슬 등 도전적인 흐름이 출현하고 있다. 나는 촛불시위를 계기로 어딘가에서 81학번과 82학번을 갈랐던 단층선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배들과의 토론속에서 아마도 08학번이 그런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08년 1학년으로 촛불시위를 맞았고 10년 점증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3학년으로서 인생과 세계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이전 세대의 무기력과는 다른 촛불이 가르쳐준 진취적인 정신이 내재되어 있었다.

 

- 내 판단이 틀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08학번인가 10학번인가 하는 점이 문제일 뿐 역사에 단층선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이제 학생운동은 새로운 궤도위에 들어 섰다.

2010년 4월 2일 금요일

김예슬과 권영길

단편선과 권영길

 

- 3.10 김예슬의 선언이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과 그냥 이야기했을 뿐이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단편선이라는 친구는 고대 앞에서 콘써트를 조직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아쉬운 것은 이 친구가 이제는 김예슬을 잊고 홍대 앞 철거 싸움에 결합한 점이다. 철거 싸움도 중요한 싸움이지만 김예슬이 싸움은 더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는 오랫동안 홍대에 매일 것이다. 김예슬은 자신을 이해하는 열성적인 친구 하나를 잃었다.

그런 가운데 서울대 채상원이라는 친구가 성명(대자보)를 붙였다. 이 친구는 작년 도청 사건과 연루된 학생이란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후배의 블로그를 통해 보았다. 후배의 블로그에서는 작지만 의미있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행히도 후배는 이미 불리한 위치에 섰다. 도청을 했다고 하더라도 김예슬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는 없으니까.

돌이켜 보면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하는 길을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 나는 어제 후배들과 민주노동당이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과 연대.통합해야 한다는 요지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롭게 진지한 토론 끝에 나는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다음 주 노동운동 선배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나는 이 자리에서도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결별을 하는 한이 있어도 진보신당과의 연대와 단합을 위한 모종의 행동을 할 것을 제안할 생각이다. 그러나 이 토론 또한 결국 아무 것도 결정.실행하지 못한 채 끝나게 될 것이다.

어제인가 권영길 의원이 나와 유사한 요지로 강연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6.2 이전 권영길의 이 강연이 민주노동당의 노골적인 우경화를 막는 가장 유력한 실천으로 남을 것이다.

 

-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과 생각, 이론과 이론이 경합하여 하나의 생각, 하나의 이론으로 상황이 정리되는 것이 중요한가? 물론 이런 일은 좋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논쟁을 하든 김예슬과 민주노동당을 둘러 싼 의미있는 행동은 진보진영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단편선과 노련한 정치가에서 나왔다. 단편선은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콘써트를 연 것 같지 않다. 단편선에 불로그에는 생각보다 가볍고 순진한 이야기들로 가득차다. 그러나 김예슬은 가장 사랑스런 동료를 얻었다. 2010년 3월 김예슬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김예슬의 지지자로 남겠지만 단편선은 김예슬과 구체적으로 함께 하려 했던 몇 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내가 만약 학생운동사를 쓰게 된다면 김예슬과 함께 단편선의 이름을 반드시 넣을 것이다.

 

2010년 4월 1일 목요일

가계부채 관련 세리 보고서........필독

- 가계부채 증가에 의한 민간소비 증가가 한계에 부딪히고 가계부채 증가가 역으로 민간소비를 억제하는 단계로 접어 듬

 

- 가계부채를 얻으면 이에 따라 소비 여력이 증가하는 측면이 있고 기존 가계부채까지를 포함한 부채 상환에 따라 소비 여력이 감소하는 측면이 있는데 후자가 더 커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미

글로벌 4대 기업

글로벌 대기업의 최근 변화 양상(10.3.21 연합)

 

07

08

09

삼성전자

19.2

18.6

16.7

LG전자

31.6

28.0

27.9

- 삼성전자/LG전자 국내 매출 비중

 

- 현자

* 해외법인을 포함한 현자의 총매출 53.3조 중 국내법인의 내수매출은 30% 수준

 

- 포스코

* 08년 수출 비중 28.8%에서 09년 35.3%로 증가

* 인도.인니 등에 대규모 제철소 추진 중

 

09년 혼인통계 중 특이사항

혼인(통계청, 3.24, 연합뉴스에서)

 

- 09년 혼인건수는 31만건

- 粗 혼인율(1천명당 혼인율), 70년 통계작성 이래 최저치

 

80

07

08

09

조 혼인율

10.6

7.0

6.6

6.2

 

- 외국인과 결혼

* 국제결혼 비중은 05년 13.5%에서 09년 10.8%로 점진적 하락

* 국제결혼 중 한국남과 외국여가 75.5%, 한국남과 외국여 커플에서 국적은 중국 45.2%, 베트남 28.8%, 필리핀 6.5%

* 농립어업 종사자 5640명 중 35.2% 1987명이 외국여와 결혼, 베트남.중국.캄보디아의 순

* 지역으로는 전남(13.3%), 전북(11.9%), 충남(10.9%) 순

* 한국남-외국녀의 나이 차이는 11.1세

 

- 평가

* 혼인건수 축소, 만혼 경향

* 농촌의 경우 30~40% 정도가 외국인과 결혼, 농촌에 사는 남성은 한국녀와 결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 단 절대인구의 감소로 두드러지지 않을 뿐(전체 혼인건수 31만건 중 농림어업에 종사하는 한국남-외국녀 커플은 1987건에 불과)

 

 

자살

자살(10.3.31. 연합뉴스에서)

- 08년 자살자 12858명, 하루 35.1명, 10만명당 24.3명, OECD 중 1위

- 특징은

  * 98년 8622명에서 08년 12858명으로 49% 증가,

  * 노인층은 98년 1165명에서 08년 3561명으로 205% 증가

   

55~64

65~74

75세 이상

10만명당 자살자

42.7

81.8

160.4

 

55~64

65~74

75세 이상

10만명당 자살자

42.7

81.8

160.4

 * 08년 이혼남의 10만명당 자살자는 142.2명

 

20대

30대

40대

50대

 

28.3

38.1

50.5

23.0

21.0

18.4

15.2

 

 

- 약평

* 신자유주의, 가족 붕괴로 자살자가 비약적으로 증가

* 유례를 찾기 어려운 노인 자살(75세 이상 10만명당 160.4명인데 비해 전체는 24.3명으로 7~8배 수준)

* 중고령 남성 노동자의 자살 급증

 

나라사랑청년회 모델의 종언

나라사랑청년회 모델의 몰락

- 서울지역 청년회를 중심으로

 

- 87년 6월항쟁 직후 나라사랑청년회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청년회들이 만들어졌다. 87년 6월항쟁은 첫째. 당시로 보면 소수의 명문대 중심의 학생운동을 비슷한 연배의 청년대중으로 확산시켰고 둘째. 80년대 중후반 이후 억눌렸던 청년대중의 문화적.정치적 요구를 분출시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치적.문화적 요구를 대변했던 청년회들은 91년 강경대 투쟁, 90년대 범민족대회에서 상당한 동원력을 발휘하며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96.97년을 거치며 통일운동에 중심을 둔 학생운동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학생신분으로 통일운동을 했던 청년들 중 일부가 이후 서울지역의 청년회에 모여들었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서울지역 청년회들이 이들의 참여에 의해 상당한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의 참가는 두가지 점에서 문제를 갖고 있었다. 첫째는 명확한 사회진출에 대한 의지없이 다소 낭만적인 관점에서 청년회에 참가한 점 둘째.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대한 대중적 평가를 거치지 않은 점이다.

위와 같은 한계로 인해 청년회는 서서히 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다. 88년 나라사랑청년회가 확대된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 시기의 청년회는 점차 고조되는 사회적 고립을 수동적인 차원에서 수용했다.

- 이들이 나이가 들어 30대 초중반이 되고 신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직장에서의 압박이 시작되자 청년회의 활동 지반은 빠르게 유실되고 있었다. 이들은 애초부터 명확한 운동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 직장.결혼과 같은 생활이 이들이 청년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정신적 여력을 빼앗았다.

 

- 여기에 정치사상적 나태함과 나약함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서울지역의 청년회와 달리 지방의 청년회는 어쨌든 학생운동출신이 아닌 지역의 일반청년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울지역의 청년회가 착목했던 것은 청년실업 등이었는데 이들은 끝내 ‘한국청년센터’ 수준의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에 머물렀다. 덕분에 청년대중의 사회적 이해를 대변하는 활동은 청년유니온과 같이 서울지역 청년회와 전혀 무관한 다른 공간에서 출현했다. 또한 전통적인 통일운동과 청년실업운동 사이에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중간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전자는 ‘한국청년연대’에게 후자는 ‘청년유니온’에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다.

 

- 이 과정에서 주목할만한 의미있는 행동이 나오지 않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소위 운동조직을 표방하는 단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면 대책이 거의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어느 한 방향으로 결정을 짓고(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활로를 뚫으려 하지 않은 점이다. 서울지역 청년회는 누구의 탄압도 없이 저절로 주저앉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