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과 시대적 감수성
- 우연히 어떤 선배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진보운동에서 참으로 신뢰하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역시 어른스런 풍모와 날카로운 정치감각으로 내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했다. 그런데 더 토론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 시대정신(또는 가치)으로 그는 자주.평화.자치.공동체.생태....등등을 열거했다. 의아한 것은 자연과학에도 상당한 소양이 있는 그가 새로운 시대담론으로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빼고 있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의 재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학의 발전, 인구구성이나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을 때나 가능한 시대관이다. 이미 자연과학은 세상을 빠른 속도로 바꾸고 있다. 이미 30년 단위로 나누는 한 세대안에 여러 층위, 단계의 과학적 성과들이 누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자연과학적 성과가 고정된 조건에서 사회적 문제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던 사고의 틀 자체가 폐기되거나 교정되어야 한다. 이제는 사회적 문제들 안에 자연과학적 변화 자체를 염두에 두고 고민해야할 시점에 접어 들었다.
- 다음으로 그는 시종일관 대중성.민중성.통일전선.진보정당 등의 가치를 강조했다. 물론 특유의 유연함과 통찰력으로 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대중성.민중성...등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대중성 안에서 이를 시대에 맞게 교정하려는 노력 자체가 한계일 수 있다. 대중성.민중성...등의 가치 자체가 이미 어떤 시대의 패러다임 내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세계의 물질적 기원을 중시하는 편이다. 가령 인간의 이성을 관리하는 좌뇌가 있고, 어떤 민족에는 그에 상응하는 유전적 동질성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에게 그의 삶을 좌우하는 시공간적 제약이 있는한 인간 세계는 특정한 시공간과 밀착되어 형성될 수밖에 없다. 바닷가 민족이 억센 성향을 갖고 있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내가 자영업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영화 “메트릭스”에는 인간.인간적 세계의 물질적 기초가 사라져 있다. 메트릭스의 인간은 한강, 설악산 등과 같은 구체적인 자연환경과 21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사라져 있다. 이런 세계는 공상의 영역이 아니라 조만간 현실화되거나 현실화될 세계이다.
이는 물질과 의식, 사람과 세계와 같은 근대적 패러다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인간이 지배하는 물질세계가 넓어진다는 철학적 원리가 논리적으로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단 그것이 함축하는 바가 근대라는 시대적 한계안에서 설정된 점이 문제이다. 아마도 디지털 세계의 사람은 물질과 의식, 사람과 세계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그러한 질문이 불필요한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원시 부족에게 경쟁과 이윤의 논리가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 후배들을 만나면 이러한 차이를 뚜렷히 느낀다. 현재의 20대는 40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제도 교육을 받고 자랐다. 여전히 봉건잔재가 짙게 남아있던 7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80년대 저항 위주의 행동적 성향이 몸이 밴 우리들은 20대 후배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시대에서 살았다. 이 격차는 2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훨씬 뛰어 넘는 시대적 차이를 갖고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적으로 벌어지는 천문현상(물론 장구한 시간적 안목에서는 그렇지 않지만)을 배운 세대와 지질학.진화론.빅뱅 등과 같이 동적이고 역사적인 자연과학을 배운 세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숨어 있다. 따라서 동일한 기계적 유물론의 기초위에서 이를 발전시키려는 동시대의 버전이 아니라 새로운 버전의 도입이 필요하다. 가장 뛰어난 원숭이도 가장 유치한 인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법이다.
- 김예슬의 글에서 필자가 받은 충격이 그것이다. 김예슬의 글에는 성숙한 제도교육에서 잘 훈련된 호흡과 민주주의에 도전했던 40대의 감성과는 버전을 달리하는 새로운 감수성이 잘 녹아 있다.
바둑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거친 야생마처럼 숱한 난전을 소화한 30~40대의 아마추어 최강자들이 제도화된 기사 수업을 거친 10대의 프로들을 넘을 수 없다. 이는 기사 수업안에 체계적으로 녹아있는 과학적 성과와 새로운 시대적 버전 때문이다.
금융과 IT를 뛰어 넘어 현대 자연과학에 대해 응당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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