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6월항쟁의 교훈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경제위기로 보나, 점차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의 정세로 보나 향후 몇 년은 우리 운동에서 역사적이고 격동적인 시기가 될 것이다. 아래에서는 87년 6월항쟁의 경험과 교훈을 주로 대중노선의 관점에서 살펴 보겠다.
80년 5.18 이후 83년까지 학생운동은 전두환정권과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학교에는 속칭 ‘짭새’로 불리는 사복경찰관이 상주하고 있었고, 학내 집회가 불가능해 건물옥상에서 밧줄을 메고 고공시위를 하기도 했다.
84년 일련의 유화조치가 시행된다.(이는 필리핀,한국 등에서 진행된 유화조치는 미국의 저강도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장기적으로 경성군부 대신 연성민간정치인으로 정치세력을 교체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해직된 교수들이 복직되고 학교안에서 사복경찰관들도 철수했다. 84년 이후 적어도 학내 공간은 외견상 민주적 공간이 보장되었다.
80~83년 학내에서 절치부심하던 학생운동은 84년 이후 반쯤 열려진 공간을 배경으로 극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한다. 84년 하반기 학생회가 부활되고 85년에는 전국 대학에서 전두환의 광주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시위.행사로 들끓었다.
한편 83년 무렵부터 양김씨를 따르는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이 구성되고 민주화청년연합(민청년) 등 재야조직들도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85년 2.12 12대 총선이 진행되었다. 5.18 이후 동토와 같이 얼어붙었던 민심은 합법공간이 열리자 이를 매개로 극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유세장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고 숨겨두었던 민주화의 열망을 표출하는 거점이 되었다.
2.12 총선에서 사실상 승리한 양김씨(김대중.김영삼)는 여세를 몰아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84~85년 학생운동은 학내에서는 주로 전두환 정권의 만행에 반대하는 집회.시위.학회.문화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학생대중의 공감대를 넓혀 가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을 풍자하는 노래공연, 마당놀이 등은 일반 학생들의 광범위한 참여속에 열기있게 진행되었다.
한편 조직화된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 중심가 또는 노동자 밀집지구에서 일주일에 한번 이상 거리시위를 진행했다. 거리 시위의 양상은 예정된 시각, 예정된 장소에서 ‘주동이 뜨면‘ 수백명 정도가 거리를 막고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나타나면 흩어지는 양상이었다.
대체로 4학년인 주동은 집시법으로 구속되었고 1~3학년들로 구성된 시위대오는 연행될 경우 구류 또는 훈방을 살았다. 학생들은 연행 과정에서 심한 구타와 폭행을 당했고, 연행된 사실이 부모님에게 알려지면 집안에서의 갈등 또한 심각해졌다. 당시 거리시위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학업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86년 봄이 되자 양김씨는 직선제를 요구하며 1천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서울.부산.광주 등 전국을 돌며 진행된 대회는 엄청난 인파를 끌어 모으며 전두환 정권을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반면 학생운동은 86년부터 NL과 CA로 양분되어 점점 급진적이고 과격한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86년 봄 NL은 반미를 주장하며 김세호.이재호 학생이 분신하는 등 격렬한 투쟁으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CA(제헌의회의 영문약자) 또한 ‘군사파쇼를 타도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자’는 생경한 구호를 남발했다.
85년 하반기부터 경찰병력이 학내에 진입하기 시작하더니 86년 봄에는 NL과 CA의 집회가 있다는 정보가 있으면 학내 전역에 경찰력이 진입하여 건물 안과 밖을 사이에 두고 수십.수백 단위의 조직화된 운동권 학생과 경찰력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86년 4월말 민정당과 신민주당(양김씨가 주도하는)이 ‘개헌 논의’에 합의하면서 야당이 장외 집회를 접고 장내로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비반미, 비폭력, 비용공’을 주장하며 재야와 학생들과 일정한 선을 그었다.
86년 가을 서울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전두환 정권의 대반격을 시작했다. 국회에서는 논의는 공전된 가운데 이원집정제니 내각제니 하는 정치공작이 난무했다. 이와 함께 재야와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근태.권인숙 사건과 건대사건 등이 발생했다.
장내 논의에 한계를 느낀 양김씨는 다시금 장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시위가 86년 11.29, 87년 2.7, 3.3 투쟁이다. 11.29~3.3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은 85년~86년 제한적으로 열어주었던 공간도 봉쇄한 채 그야말로 서울 전역을 전경의 바다로 만들었다.
85~86년 그 뜨겁게 호응하던 대중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삐 갈길을 재촉하는 시민들의 스산한 발걸음만 서울의 거리를 말없이 맴돌고 있었고,학생들의 시위는 많아야 수백명 수준의 게릴라식 시위에 머물렀다.
한편 건대사건(86년 10월) 이후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대중노선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NL은 그 동안의 선도투쟁 대신 대중노선을 전면에 거는 대전환을 도모한 반면 CA는 기존의 노선을 고수했다.
87년 상반기 우리는 줄곧 학내사업에 집중했다. 광범위한 학생들의 관심속에 총학생회가 건설되었고, 제적과 징계를 받은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학교 본관 농성에 들어갔다.
85~86년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 이상은 벌어지던 거리 시위는 5월까지 2~3번에 불과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87년 5월 하순경 벌어진 거리시위였다. 당시 서울대는 전통적인 거리 시위를 답습하여 그저그런 성과를 남겼다. 반면 연고대는 종로거리에서 연좌연와하는 당시로 보면 전혀 새로운 형태의 대중운동을 보여주었다. 화염병이나 전투조도 없이 연행을 각오한 비장한 연좌연와 시위는 운동진영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87년 4.13 전두환은 기존의 5공화국 헌법(이에 따르면 대통령은 간선제)에 따라 87년 하반기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계기로 87년 대선을 둘러 싼 어중간한 공간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싸움은 ‘호헌-개헌’으로 명확히 양분되었고 직선제는 국민대중의 힘으로 쟁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6.10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민정당은 잠실체육관에서 87년 하반기 치러질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고 ‘야당과 재야’는 거리 시위를 조직했다.
6.10 이후의 거리 시위는 11.29~3.3까지 진행되었던 거리 시위와 확연히 달랐다. 서울에서 거리 시위에 참가한 학생만 수만이 넘었고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 명동 주변의 화이트 칼라들 또한 학생들의 시위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이 과정에서 대중노선으로 무장한 NL과 86년 과격한 방식을 고수하는 CA는 극명하게 갈렸다. 이를 차례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직이다.
총학생회장은 NL노선을 갖는 어떤 특정 정파의 학생이 아니라 2만학생의 대표자인 반면 ‘....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은 그저 한사람의 운동권 학생에 불과했다. 또한 ‘......투위’가 엄선된 조직원만을 대상으로 했다면 학생회는 학생회의 골간 체계를 타고 학년과 정견의 구분없이 모든 학생들을 망라했다. 권위와 동원력에서 양자의 차이는 너무도 뚜렸했다.
둘째. 구호의 문제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따위는 대중과 정세의 요구를 잘 대변한 반면 ‘제헌의회 소집’과 생경한 구호는 대중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주었다.
셋째. 운동방식의 문제이다.
NL은 인도에서 손뼉을 치며 구호를 외치거나 길거리를 지나는 버스에게 일제히 클랙션을 울려 줄 것을 요청했다. 아니면 연와와 연좌, 대중연설 등 대중의 참여와 동참을 이끌어내는데 주력했다. 반면 CA는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경찰 병력과 격렬히 대치했다. 덕분에 NL이 가는 곳에는 사람이 모이는 반면 CA가 있는 곳에서는 인적이 드물었다.
넷째. 호흡의 문제이다.
85~86년 수백명 수준의 거리 시위가 87년 6월항쟁과 같은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87년 7~8월 노동자투쟁의 경우에도 수많은 소모임, 노동조합 결성 시도가 진행된 수도권보다는 울산.거제.창원 등이 오히려 활발했다.
대중은 쉽게 운동진영의 호소에 공감하지 않는다. 학내에서 학외로, 인도에서 차도로 발걸음 하나를 옮기는데 무수한 고민과 결단이 필요하다. 운동하는 사람의 임무는 인내를 갖고 이러한 도전을 안내하고 용기를 고무하는 충실한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87년 6월항쟁의 경험을 지금 시점과 비교하면 어떨까?
2009년 3월 현재 합법공간이 극도로 축소된 가운데 대중적인 분노가 쌓여가는 양상은 86년 11.29~87년 3.3과 유사하다.(물론 이는 상대적인 비교이다)
2008년 상반기 촛불시위는 7월 초 1차로 합법공간이 좁아졌고 2009년 초 용산참사를 계기로 강도가 세졌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10%대로 떨어졌다가 30% 중반대로 일정하게 반등했다. 현재 국민대중의 상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발강도에 비해 거리시위에 나설 수준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의식화.조직화 사업을 꾸준히 벌여야 한다. 생경한 구호나 말투를 자제하고 촛불시위의 코드에 맞게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쌍방향의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조직화의 경우 정견을 초월하여 해당 계급계층 또는 전국민대중을 폭넓게 포괄하는 형태를 지향해야 한다.
대중운동의 경우 대중의 구체적인 이해를 중심으로 대중 스스로가 참여하는 운동을 적극 벌여야 하며, 국민대중의 지지와 엄호를 중시해야 한다. 기동적인 집회나 시위의 경우 창조적이고 승산있는 싸움을 통해 참가한 대중을 각성시키는 방향에서 전개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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